몸으로 쓰는 약리학 5부 — 내 몸을 실험실로 삼다
같은 약인데 왜 오늘은 다를까. 닷새의 기록을 시간축에 놓고 보니 약 자체보다 시작점, 식사, 누적, OFF의 깊이와 같은 조건이 함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몸으로 쓰는 약리학 5부 — 내 몸을 실험실로 삼다
약을 오래 먹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약인데 왜 오늘은 다르지?
어제는 잘 움직였는데 오늘은 늦다. 어떤 날은 같은 용량으로 이상운동증이 생기고, 어떤 날은 충분히 올라오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이런 차이를 모두 병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을 오래 하다 보니 조금씩 다른 모습이 보였다.
약은 같아도 조건이 달랐다.
공복인지 식후인지. 전날 약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 수면이 어땠는지. 변비가 있었는지. 이미 몸 안에 어느 정도 약효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음 약이 들어갔는지.
결국 나는 약을 보지 않고는 몸을 이해할 수 없었고, 몸을 보지 않고는 약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내 기록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작은 관찰 실험이 되었다.
30장. 여기서 말하는 실험은 무엇인가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말하는 ‘실험’은 무모하게 약을 바꾸거나, 다른 환자에게 따라 해보라고 권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같은 계열의 약을 복용해왔고, 내 몸에서 ON과 OFF, 이상운동증, delayed ON, incomplete ON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계속 관찰해왔다. 그 과정에서 생긴 질문을 기록으로 확인해보려 한 것이다.
이 글은 치료 지침이 아니다. 한 환자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시간축 위에 놓고 해석해본 기록이다.
관찰은 공유하지만, 실험을 권하지 않는다. 과정을 설명하지만, 처방을 제시하지 않는다. 내 경험은 데이터이지만, 다른 사람의 치료법은 아니다.
31장. 닷새 동안 무엇을 봤는가
2026년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닷새 동안 나는 비슷한 조건을 반복해서 기록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오늘 약이 잘 들었다” 정도로 끝날 수 있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적고, 용량을 적고, 첫 신호를 적고, ON이 된 시각을 적어보니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전이었다.
06시경 서방형 제제(퍼킨 CR 100mg)를 복용하고, 07시 20분경 공복 상태에서 즉방형 75mg을 복용했을 때 두 차례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08시에서 08시 20분 사이 첫 신호. 08시 15분에서 08시 30분 사이 ON. 그리고 약 5시간 정도 비교적 안정된 구간. 기록상 뚜렷한 이상운동증은 없었다.
두 번의 반복만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몸에서는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비슷한 패턴이 두 번 나타났다.
이것이 기록의 시작점이었다.
32장. 같은 약도 ‘맨바닥’과 ‘이미 올라온 몸’에서 다르다
서방형 약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약 자체의 용량만 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몸 안에 약효가 남아 있는 상태와 완전히 OFF에 가까운 상태는 다르다.
내 기록에서는 퍼킨 CR 100mg을 거의 바닥에서 복용했을 때 첫 신호까지 약 85분이 걸렸고, 완전한 ON까지는 약 215분이 필요했으며 그 ON도 30분 남짓 만에 무너졌다.
반면 낮의 약효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저녁에 같은 CR 100mg을 사용했을 때는 6~7시간 가까이 흐름이 유지되는 날이 있었다.
같은 알약이었다.
약의 효과는 약 한 알의 성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몸이 그 약을 받기 전 어디에 있었는지가 함께 결정한다.
나는 이것을 ‘초기조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같은 투입이라도 시작점이 다르면 출력곡선은 달라진다. 4부 24장에서 “약은 전날부터 이어진다”고 썼는데, 그 말이 숫자로 나타난 셈이다.
33장. HBS와 CR은 정말 다른가
내 기록에는 마도파 HBS 100mg과 퍼킨 CR 100mg을 비교한 값도 남아 있다.
맨바닥에서 첫 신호는 HBS가 약 120분, CR이 약 85분. 반면 완전한 ON까지 걸린 시간은 HBS 약 180분, CR 약 215분으로 기록됐다. 둘 다 단독으로 완전한 ON이 유지된 시간은 약 30분 정도였다.
흥미로운 숫자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상하다. 첫 신호는 CR이 빨랐는데 완전한 ON은 HBS가 빨랐다. 같은 약을 같은 조건에서 쟀다면 나오기 어려운 조합이다.
이 어긋남 자체가 답을 말해준다. 측정한 날의 조건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식사. 전날 약. 배경약. OFF의 깊이. 수면. 위장 상태. 이 모든 것이 달랐다.
그래서 이 숫자가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약의 우열이 아니었다.
비교하려면 조건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34장. 공복과 식후가 달랐던 날
9월 1일에는 한 가지 특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오전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오후 햄버거 식사 뒤 보완 목적으로 복용한 즉방형 50mg의 반응은 달랐다. 공복에서는 15분 만에 첫 신호가 오고 50분이면 충분한 ON이 되던 약이, 이날은 충분한 ON까지 약 105분이 걸렸다. 피크가 뒤로 밀렸고, 이상운동증이 약 2시간 20분 동안 이어졌다.
그 순간에는 음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2부 7장에서 쓴 대로 위 배출과 아미노산 경쟁이 약효를 늦출 수 있으니 이론적으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식사량. 지방. 단백질. 위 배출 속도. 이미 몸 안에 쌓여 있던 약효. 오후의 누적량. 여러 변수가 동시에 있었다.
그래서 내 기록에는 이렇게 남기는 편이 더 정확하다.
식후 조건에서 피크가 늦어지고 이상운동증이 길게 나타났다. 원인은 아직 모른다.
이 한 문장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관찰과 해석 사이에 거리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35장. 온젠티스 잔류라는 가설
8월 29일에는 전날 밤 복용한 온젠티스의 영향이 아침까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날 오전에는 국소 이상운동증이 있었고, 오후에는 전신 이상운동증이 40분 이상 나타났다. 며칠 뒤 온젠티스를 복용하지 않은 날에는 같은 정도의 이상운동증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흥미로운 차이다. 온젠티스는 혈중 반감기가 짧아도 COMT 억제 효과가 하루 넘게 이어지는 약이라, 밤에 먹은 것이 다음 날 아침 레보도파 곡선을 키웠다는 해석은 약리학적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가 아니다. 온젠티스 잔류 효과였을 수 있다. 오후 누적량이 달랐을 수도 있다. 흡수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날의 상태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기록은 ‘결론’이 아니라 가설이다. 온젠티스를 유지했을 때와 조정했을 때 좋은 ON과 이상운동증이 각각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진료에서 함께 볼 질문으로 남겨두었다.
36장. 비슷해 보였지만 달랐던 두 저녁
8월 31일과 9월 1일 저녁은 기록표만 보면 비슷했다.
같은 시각에 같은 퍼킨 CR 100mg을 복용했고, 비슷한 시간에 약효의 신호가 왔고, 잠들 때까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다. 기록표의 분류만 보면 두 저녁 모두 ON이었다.
하지만 몸으로 경험한 두 저녁의 질은 달랐다.
첫날은 걸을 수 있었지만 다리가 뻣뻣했다. 한 걸음씩 의식적으로 지시해야 했다. 다음 날은 골이 왔을 때 즉방형 50mg을 복용한 뒤 보행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첫날은 배터리를 쓰며 버틴 느낌이었고, 다음 날은 몸을 덜 소모하며 쉴 수 있었다.
이 차이를 나는 오랫동안 “ON이 좀 약하다”는 말로 뭉뚱그려왔다. 그런데 두 저녁을 나란히 놓고 보니 그것은 약한 ON이 아니라 부분 반응이었다. 운동 증상의 일부는 좋아졌지만 보행의 자동성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 2부 9장에서 incomplete ON이라고 이름 붙인 바로 그 상태였다.
작은 추가 용량이 실제 차이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다. 서방형은 천천히 올라오고 즉방형은 빠르게 흡수되므로, 즉방형 50mg이 필요한 수준에 더 빨리 도달하도록 도왔을 수 있다. 그러나 이틀의 관찰만으로 50mg이 직접 원인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식사, 위 배출, 수면, 활동량, 이전 복용분의 잔여 효과와 병 자체의 자연 변동도 함께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는다.
가설: 저녁 CR 100mg만으로는 충분한 기능 회복에 이르지 못한 날, 즉방형 50mg이 필요한 수준에 더 빨리 도달하도록 도왔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는 가설이 아니라 관찰이다.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ON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보행의 자동성과 피로는 중요한 결과였다.
37장. 심한 OFF에서 빠르게 나타난 반응
9월 2일에는 심한 OFF 상태에서 확산정 50mg의 반응 시간을 자세히 적어보았다.
복용 후 약 15분에 첫 신호. 18분에 더 강한 신호. 32분경 출력 회복. 42분경 자동보행.
이것은 분명 인상적인 기록이었다. 하지만 표본은 한 번이다. 한 번 빠르게 반응했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시간에 반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한 번의 기록은 다음 질문을 만들었다. OFF의 깊이가 달라지면 반응시간도 달라질까. 식후에도 같은가. 수면이 나쁜 날에도 같은가.
이런 질문들이 생기면서 기록은 다음 관찰로 이어진다.
38장. 치료창이라는 생각
오랫동안 기록하다 보니 ON과 OFF 사이에 하나의 구간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너무 낮으면 움직임이 충분하지 않다. 적절한 구간에 들어오면 자동보행과 움직임의 유연성이 살아난다. 하지만 더 올라가면 이상운동증이 나타날 수 있다.
3부 13장에서 이것을 치료구간이라고 불렀다. 닷새의 기록은 그 구간이 내 몸에서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었다. 즉방형 25~50mg 정도의 작은 차이에도 상태가 달라질 만큼 반응이 예민했다.
그렇다고 “내 치료창은 25~50mg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경구 복용량과 뇌의 도파민 농도는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흡수율, 위 배출, 음식, 병용약과 이전 복용분에 따라 같은 용량의 효과가 달라진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현재 기록 범위에서는 25~50mg 단위의 변화에도 상태가 달라질 만큼 반응이 예민해 보였다.
내 앱(약효일지)에는 이 구간을 ‘LED급’이라는 숫자로 표시하는 기능이 있다. 복용 시각과 제형 특성으로 계산한 추정 단위일 뿐, 실제 혈중농도나 표준화된 임상 측정값이 아니다. 내 몸의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인 모델이다.
이 모델의 목적은 약을 더 먹을지 덜 먹을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아주 작은 차이가 몸에서는 큰 차이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5부를 마치며 — 실험의 끝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정답을 찾고 싶었다. 어떤 약을 몇 시에 먹으면 가장 좋은가. 어떤 조합이 가장 오래 가는가.
하지만 기록을 계속할수록 정답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이 더 정교해졌다.
약이 늦게 올라오는가. 충분히 올라오지 않는가. 너무 높이 올라가는가. 이미 남아 있던 약과 겹친 것인가. 식사 때문인가. OFF의 깊이가 달랐던 것인가.
닷새가 남긴 질문은 이렇다.
- 아침 CR 100mg 단독 반응이 반복해서 늦고 짧은가?
- 아침 즉방형 추가 뒤 호전이 빨라지는 현상이 반복해서 재현되는가?
- 식사 전후에 즉방형 반응 시간이 얼마나 달라지는가?
- 오후 CR 뒤 이상운동증은 이전 용량과의 간격에 따라 달라지는가?
- 저녁의 CR 단독과 CR·즉방형 조합은 보행의 질에서 반복 가능한 차이를 보이는가?
- 온젠티스를 유지하거나 조정했을 때 좋은 ON과 이상운동증은 각각 어떻게 달라지는가?
실제 변경은 담당 신경과 의료진과 상의하며 한 번에 한 변수씩 확인해야 한다.
내 몸을 실험실처럼 본다는 것은 결국 약을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더 정확하게 관찰하는 일이었다.
이 글은 환자 한 사람의 자기 기록과 해석이며 의학적 조언이나 처방이 아니다. 레보도파, 온젠티스, 도파민 작용제, 아만타딘 등 약의 용량·시각·조합 변경은 반드시 담당 의료진과 상의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보행 악화, 반복 낙상, 심한 이상운동증, 환시·혼돈, 실신 또는 심한 저혈압이 있으면 즉시 의료진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